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제임스 사이디스 (문단 편집) == 말년 == 하버드 교수직을 사퇴하고 시간이 흐른 1924년 뉴욕의 언론사의 한 기자는 월스트리트 사무실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사이디스를 찾아냈고 사이디스는 월급 10만원 정도를 받으며 금고의 지폐를 계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원래 계산기를 이용해서 지폐를 계산해야하지만, 시디스는 계산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모두 암산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는 언론들을 상대로 사생활 침해로 고소했지만 법원이 '''"당신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공인이다."'''라고 판정해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 7년여간의 힘든 법정싸움 끝에, 그는 연방정부 대법원에서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35살에는 뉴욕 시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으나 석차는 254등이었다. 정말 문제를 못 풀었거나(지능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므로) 공부를 적게 했다거나 하는 단순한 이유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미국 공무원 시험의 난이도가 상당히 쉬웠음을 알았을 때 이 등수가 그의 지능저하를 나타낸다기보단 상위권으로 합격했을 시 받게 될 언론의 주목을 꺼려 의도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생애를 마감하는 그날까지 공무원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게 된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최소 25개 이상의 외국어와 방언에 정통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대부분 익명으로 여러가지 논문과 책을 저술했는데 분야는 다양해 우주, 공간, 언어, 사회, 전차, 교통, 심리,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등이 있다. 기존의 [[퍼페추얼 캘린더]] 구조에서 윤년까지 계산되는 퍼페추얼 캘린더를 새로운 형식으로 개발해 특허를 받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www.sidis.net/Calend2.jpg]] 사이디스가 개발한 새로운 형식의 퍼페추얼 캘린더 이후 사이디스는 [[1944년]], [[미국]] [[보스턴]] 에 한 작은 허름한 아파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채 집주인 에게 발견 됐지만. 이미 [[뇌출혈]]로 사망한 뒤였다. 이후 시신은 보스턴 시립묘지에 매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